스크린 위로 흐르는 광기와 환희의 오케스트라: 박찬욱부터 코폴라까지
개봉 열흘 남짓 만에 157만 관객을 홀려버린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사실 꽤나 섬뜩하고 치밀한 음악적 서사시다. 영화가 흥행 가도에 오르면서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 사이에서는 장면마다 흘러나오던 묘한 선율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시각적 쾌감 그 이상으로 귓가를 파고드는 삽입곡들의 짙은 여운 때문이다. 오프닝을 묵직하게 여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23번 A장조(K.488) 2악장 아다지오부터 심상치 않다. 고전주의 특유의 정제된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F♯ 단조가 주는 특유의 쌉싸름한 불안감이 은근슬쩍 신경을 긁어댄다. 잔잔한 현악기의 서스펜스와 피아노의 느릿한 호흡은 그저 평온해 보이는 인물의 일상 이면에 똬리를 튼 거대한 파국을 넌지시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다 영화 중반부에 이르러 조용필의 1981년작 ‘고추잠자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극의 공기는 기괴하게 반전된다. 동요를 연상케 하는 한없이 밝고 통통 튀는 리듬이 핏빛 폭력과 정면으로 들이받을 때의 그 짜릿한 불쾌감. 한바탕 실컷 웃고 났는데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박찬욱식 ‘음악적 아이러니’가 스크린을 찢고 나오는 지점이다. 이 숨 막히는 폭주의 앞뒤로 김창완과 배따라기의 곡을 배치한 감각도 절묘하다. 비 내리는 씬에 깔리는 김창완의 ‘그래 걷자’(1983)는 “그냥 걷자”며 읊조리는 담백한 목소리로 헛헛한 체념을 그려내고, 회상 씬의 배따라기 ‘불 좀 켜주세요’(1984)는 지글거리는 아날로그 노이즈를 통해 마치 빛바랜 노란색 기억 속으로 관객을 멱살 잡고 끌고 들어간다. 폭발 직전의 감정과 고요한 진공상태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숨을 고르게 만드는 마법이다.
여기에 이성민이 연기한 구범모의 첫 등장 씬에서 브라스 사운드로 귀를 때리는 샘 앤 데이브의 ‘홀드 온 아임 커밍’(1966)은 또 어떤가. 끈적한 흑인 소울의 그루브가 인물의 묘하게 엇나간 과장된 몸짓과 얽히며 실소와 묘한 긴장감을 동시에 자아낸다. 최근 박 감독 본인이 라디오에 나와 직접 픽업했다고 밝힐 만큼 애착을 보인 선곡이기도 하다. 그렇게 온갖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태운 영화는 프랑스 바로크 음악가 마랭 마레의 ‘르 바디나주(Le Badinage)’로 고요히 막을 내린다. 장난이라는 뜻의 제목과 달리, 첼리스트 장기엔 케라스가 켜내는 비올의 선율은 곡이 진행될수록 앙상한 여백만을 남긴 채 지독한 쓸쓸함을 던진다. 헛웃음과 짙은 허무가 교차하는, 완벽한 박찬욱의 세계다.
이렇듯 감독이 치밀하게 설계한 청각적 질감과 미장센이 인간의 광기를 어떻게 스크린에 박제하는지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경이롭다. 시카고 선타임스에서 40년 넘게 펜을 굴리며 세계 최고의 영화 평론가로 군림했던 고(故) 로저 에버트 역시 이런 맹렬한 시네마적 성취에 평생 매료된 인물이었다. 그가 죽기 1년 전인 2012년, 영국영화협회(BFI)의 ‘사이트 앤 사운드’ 매거진 투표를 위해 남긴 생애 마지막 ‘올타임 베스트 10’ 리스트를 들여다보면, 음향과 이미지로 인간 본성을 끄집어내는 거장들을 향한 그의 지독한 편애를 엿볼 수 있다. “리스트를 꼽는 건 우스운 짓이지만, 투표를 해야 한다면 게임의 룰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그가 꿋꿋하게 골라낸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베르너 헤르조그의 ‘아귀레, 신의 분노’(1972)였다.
에버트는 이 영화를 두고 “헤르조그의 천재성을 가장 생생하게 구현해낸 작품”이라며 망설임 없이 별 넷을 쾅 박았다. 촬영장 밖에서도 서로를 죽일 듯이 증오했던 헤르조그와 주연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의 파괴적인 관계는 오히려 엘도라도를 찾아 헤매는 정복자 로페 데 아귀레의 미치광이 같은 여정에 날것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헤르조그는 애초에 정교한 대사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슛 들어가기 10분 전까지도 무슨 대사를 칠지 몰랐다는 그의 일화처럼, 영화를 지배하는 건 서사가 아니라 미니멀한 접근 방식과 포폴 부(Popol Vuh)의 기괴한 스코어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스산함이다. 카메라 앞에서 서서히 붕괴해 가는 킨스키의 표정과 정글의 신경증적인 사운드는, 거대한 야망에 홀려 오만의 죄를 저지르다 결국 무자비한 우주 앞에 짓눌려버린 인간의 초상을 소름 끼치게 직조해 냈다.
이 광기의 스펙트럼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서 또 다른 궤적을 그린다. 에버트가 비유가 아닌 진짜 척추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고 고백한 이 작품은 코폴라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빚어낸 가장 오만하고도 눈부신 결실이다.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오지』를 베트남전으로 이식한 이 영화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킬고어 중령(로버트 듀발)의 헬기 부대가 베트콩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씬을 보라. 살육의 현장에 덧입혀진 장엄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폭력에 한없이 무감각해진 전쟁의 참상을 가장 기괴하고 미학적인 방식으로 전시한다. 박찬욱의 ‘고추잠자리’가 일상 속 폭력의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파고든다면, 코폴라의 ‘발퀴레’는 거대한 지옥도 위에 미치광이의 스피커를 틀어놓는 식이다. 결국 시대와 국적을 막론하고 스크린 위에서 영원히 살아남는 것들은, 얄팍한 논리나 활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의 극단을 기어코 체험하게 만드는 거장들의 서늘한 광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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