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붐이 쏘아 올린 메모리 품귀, 그리고 기지개를 켜는 ‘중국 반도체’의 역습
최근 미국 증시에서 마이크론 테크놀로지(MU)의 주가가 하루 만에 10.84% 급등하며 시장의 이목을 끌었다. 인공지능(AI) 모멘텀이 다시 불붙으며 전 세계적인 메모리 반도체 공급난이 재조명받은 덕분이다. 흥미로운 점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춤추게 하는 이 거대한 ‘AI 붐’과 ‘공급난’이 역설적이게도 미국 제재에 짓눌려 있던 중국 반도체 산업에 완벽한 생명줄을 쥐여줬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중국판 엔비디아’를 표방하는 캠브리콘(한우지)의 최근 공시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캠브리콘은 2025년 연간 순이익이 최대 21억 5000만 위안(약 4500억 원)에 달할 것이라는 꽤 충격적인 전망치를 내놨다. 미국의 촘촘한 수출 통제망 속에서 만년 적자의 늪에 빠져 있던 사실상의 내수 100% 기업이 일궈낸 첫 연간 흑자다. 매출 역시 전년 대비 410% 폭증한 60억 위안으로 뛰어오를 것으로 보인다. 엔비디어나 AMD의 고성능 칩을 구하기 어려워진 중국 빅테크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혹은 대안으로 자국산 GPU를 싹쓸이한 결과다. 현지 매체들이 이를 두고 “중국 반도체 기술의 시장성을 증명한 역사적 이정표이자 반격의 서막”이라며 자평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은 비단 캠브리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커촹반에 ‘중국산 GPU 1호’ 타이틀을 달고 등판한 무어스레드, 그리고 메타X 역시 2025년 매출이 수백 퍼센트씩 뛰며 적자 폭을 절반 가까이 덜어낼 것으로 예상된다. 비상장사인 알리바바 산하 T-헤드의 행보는 한층 더 매섭다.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의 중국 맞춤형 다운그레이드 칩인 H20과 맞먹는다는 최첨단 AI 칩 ‘젠우 810E’의 납품 물량이 이미 10만 장을 넘어섰다. 캠브리콘의 판매량을 가볍게 웃도는 수치로, 올해 내 손익분기점 돌파마저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시선을 메모리 반도체로 돌려보면 상황은 더 노골적이다. 마이크론의 주가를 폭등시킨 글로벌 메모리 가격 급등 현상은 낸드플래시 제조사 양쯔메모리(YMTC)와 D램 업체 창신메모리(CXMT)에게도 든든한 동아줄이 됐다. 겉으로는 조심스레 ‘2026년 흑자 전환’을 입에 올리지만, 증권가에서는 가파른 가격 상승세에 힘입어 양사 모두 2025년에 이미 연간 흑자 성적표를 쥐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의 전략은 꽤 영리하다. 내수 빅테크들의 데이터센터라는 거대한 텃밭을 기반으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선두 주자들이 고부가 제품에 집중하느라 힘을 빼고 있는 범용 중저가 메모리 시장의 빈틈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과거 중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 없이는 숨도 쉬지 못하던 기업들이, 이제는 어엿하게 시장의 현금 흐름을 창출하며 ‘정부 주도’에서 ‘시장 주도’ 성장으로의 치명적인 체질 개선을 이뤄내고 있는 셈이다. 넘쳐나는 현금은 필연적으로 더 공격적인 R&D와 설비 투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트렌드포스는 올해 말 중국 AI 칩 시장 내 자국산 반도체의 침투율이 50%에 육박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 의회조사국(USCC) 역시 중국이 2030년 전후로 구형 레거시 반도체 분야에서 완전한 자급자족을 이룰 것이란 경고 섞인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이 거침없는 부상은 당장 한국 반도체 산업의 턱밑을 겨누는 실질적인 위협이다. 중국 내 빅테크들이 자체 GPU 생태계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면 엔비디아 등 미국산 AI 칩의 수요는 필연적으로 감소한다. 이는 곧 엔비디아의 밸류체인에 깊숙이 엮여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하는 국내 기업들의 타격으로 직결된다. 게다가 두둑한 현금을 챙긴 중국 메모리 기업들이 레거시 시장에서 본격적인 치킨게임(저가 물량 공세)의 방아쇠를 당긴다면, 범용 메모리 가격의 상승 동력은 꺾이게 되고 결국 삼성과 SK의 수익성 전선에도 짙은 먹구름이 낄 수밖에 없다. AI 붐이 터뜨린 화려한 축포 뒤에서, 한국 반도체를 향한 묵직하고 서늘한 청구서가 조용히 날아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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